산상수훈에 나오는 여섯 가지 반대명제 중 마지막 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3∼44절)입니다. 예수님이 예로 들고 있는 레위기 말씀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만 있지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있지도 않은 말씀을 첨가하면서까지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에게 사랑은 공동체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공동체적 연합을 이루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항상 미움이 함께 갑니다. 공동체적 사랑이 강할수록 공동체 외부 존재에 대한 혐오가 강해집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원수’는 단지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의 일차적 의미는 공동체의 적, 즉 공동체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거나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 그리고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친족체계를 흔들고 파괴하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가족체계를 무너뜨리는 음행한 자나 몸을 파는 창녀, 혈연적인 민족체계를 더럽히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민족 반역자인 세리, 그리고 거룩한 사회체계를 무너뜨리는 자들, 즉 죄로 인해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병자나 장애인 등이 바로 원수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만들어진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사람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친족체계 안에 있는 이웃을 사랑했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원수는 미워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친족체계 안의 이웃과 대립된 존재로 여겨지는 원수를 사랑할 때 드러납니다. 차별과 배제, 혐오와 폭력을 넘어 창녀와 세리, 병자와 장애인,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사랑할 때 드러납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있는 자를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것의 본질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악인과 선인을 가르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르는 ‘막힌 담’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차별과 배제, 혐오와 폭력을 생산하는 막힌 담을 헐어버리시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사랑입니다.

유대인은 거룩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통해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만들어냈습니다. 경계선 안에 있는 것은 포용하고 사랑하지만 경계선 밖에 있는 것은 배제하고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켜낸 거룩은 진정한 거룩이 아닙니다. 진정한 거룩은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사랑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룩을 온전함으로 해석합니다. 온전함이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해를 비추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온전해질 수는 있습니다. 사랑할 때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기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거룩한 사람이 자비로운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이 거룩한 것입니다.

최근 제주도에 무사증 제도를 이용해 예멘인 561명이 입국하면서 난민 문제가 이슈화됐습니다. 이슬람 포비아 현상까지 더해져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때에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가 아니라 “누가 난민의 이웃이냐” 아닐까요. 과연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도영 더불어숲동산교회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77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