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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동산교회의 존재론적 비전

하나님 나라의 신학 ('구속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의 통합)

개인의 죄와 내세의 문제만을 다루는 신학적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이슈와 공공적 사안에 대한 신학적 답을 갖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할 수 없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대안을 갖기 어렵다. ‘예수님에 관한 복음’(구속 신학)과 ‘예수님이 말한 복음’(하나님의 나라 신학)이 통합되어야 한다. 두 복음은 타원의 두 초점처럼 분리불가능하다.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해(희년)’을 선포하시고, 치유와 가르침과 선포를 통해 성취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성경은 개인 영혼 구원에 대한 협소한 구원이 아니라 통전적이고 전우주적인 회복이라는 비전을 구원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죽은 후에 가는 내세적인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철저히 영육이원론과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헬라적이고 이방적인 개념일 뿐이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는 나라’이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주권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영역의 통치자가 되심을 의미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선교’의 현장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목적은 ‘삶 이후의 삶’이 아니다. 죽어서 내세를 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모두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 기독교의 구원의 목적은 ‘삶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다. 바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룬 모든 성취는 헛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불타 없어져버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의 공력에 타서 없어지지 아니할 재료로 건축된다. 부활의 신앙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속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마 16장과 막 8장에서 말씀하신 제자도는 ‘로마제국의 방식’, ‘황제의 방식’, ‘가이사랴 빌립보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 ‘인자의 방식’, ‘갈릴리의 방식’, 즉 십자가의 방식을 따르는 삶이다. 한 마디로 제국과 천국의 싸움 한복판에서 천국의 편에 서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 또한 예수님은 제국적 질서를 승인하고 유지하는 ‘시민 종교’와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민 종교를 통해 승인되고 유지되는 제국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자기충족적이며 자기완성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권력과 부와 지식을 상대화하고 비판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며 현실을 변혁하며 새롭게 창조하면서 ‘미래의 현존’으로 ‘지금 여기에’ 도래하는 역사적 희망이다.

십자가의 영성 (번영과 탐욕의 영성에서 십자가의 영성으로)

한국 교회는 번영의 신학과 탐욕의 복음에 물들어 있다. 그렇기에 자기부인의 영성과 타자를 위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고, 가장 낮은 자들에게 나아가지 못하며 모순과 아픔이 있는 곳에 서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침묵'을 사고할 줄 모르고, 무신성의 한 가운데서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에 대해서 사고할 줄 모른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영성이 없다.



십자가는 신비주의적이고 교리적인 신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양식’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으로서의 십자가가 없기에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가 너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는 싫은데 그리스도는 좋다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세상 나라를 닮아 ‘권력과 지혜’를 추구할 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 좁은 길로 나아가야 하는 ‘약함’과 ‘어리석음’의 십자가가 없다. 금, 은, 놋, 쇠,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상을 타격하여 부수고 흩어버리는 ‘손대지 아니한 돌’이며, 짐승의 나라를 파하고 그의 권세를 빼앗아 인자의 나라를 세우는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약함과 어리석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따라서 그의 몸된 교회는 약함과 어리석음을 통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한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사와 권세’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룬다. 개인적 차원의 죄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의 죄의 문제를 다룬다. 십자가는 바로 정사와 권세의 폭력이 쏟아지는 현장이며 정사와 권세의 총공격이 이루어지는 현장이었고, 그 악과 죄와 폭력을 ‘대속적이고 비폭력적인 사랑의 희생’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고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 그리고 사랑과 정의의 나라를 이 땅에 새롭게 창조한 현장이었다.
십자가는 가해자의 죄와 죄책에 대한 용서와 회해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상처와 수치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선물한다. 피해자의 상실과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악의 실체를 드러내며, 사랑의 능력으로 승리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영광스럽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피해자의 탄원을 신원하여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무고한 자들의 핏소리를 듣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신원하고 화해시키는 능력을 발하는 자들이다.
십자가는 ‘죄책감’ 뿐 아니라 ‘수치심’의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핵심에는 ‘수치’가 있다. (마 26:67-69. 막 15:16-19. 마 27:39-44.) 십자가가 수치심으로서의 죄책감을 다룬다는 것은 인간을 윤리적 존재로 본다는 말이다. 수치를 느끼는 자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죄에 자기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세상의 불의를 보고 자기도 거기에 연루되어 있기에 거기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수치를 느낀 자만 의분을 느낄 줄 알고 죄와 싸운다. 십자가의 수치를 짊어진 자는 세상의 죄에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아니하고 그 죄와 싸운다.

성령의 능력 (인간의 능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주체가 되기 원하셔서 보내신 분이 성령이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영이시며 자유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생명의 영이시며 평화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야만 영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성공과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패와 연약함에 대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은사의 영이시다. 오순절의 체험은 공동체적 체험이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 결과이다. 바벨의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백성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창설된 것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관계성과 사회성을 드러내는 영이시다.
성령충만을 우리는 능력과 은사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능력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 은사적인 면과 성품적인 면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말씀과 진리가 없는 성령운동은 깨어짐이 없는 성령운동으로 흘러 십자가의 복음을 탐욕의 복음으로 만들며, 깨우침이 없는 성령운동으로 흘러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만든다. 또한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다. 성령의 근본적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요 16:14). 산사람 예수의 삶을 본받게 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 성령운동이 되어야 한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시기에 자신이 이미 선교하시는 영이시며,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영이시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만물과 인간 안에서 탄식하시는 영이시기에 우주와 역사 한 가운데서 종말을 선취하게 하며, 보내받은 자들로 하여금 신실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눅 24:46-49에 의하면 ‘메시야성’과 ‘선교성’은 신약에서 주장된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핵심사상임을 알 수 있다.

급진적 제자공동체

제자도를 잃어버리고, 값싼 은혜만을 남발하며,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어서 급진적인 윤리가 불가능하고 변혁적인 사회윤리도 없고 시대적 고민도 없는 한국교회의 회복은 제자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작게 만들고 싶어 하며,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한다. 소비자 중심적 교회에 다니는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우리가 다가가기에 편한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복음은 급진성과 불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사는 제자공동체는 복음의 체제전복적인 급진성과 세상을 소란케 하는 불온성을 가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Savior)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금이며 주인(Lord)되신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선포하고 온전히 살아야 한다. 복음은 ‘선물’인 동시에 ‘과제’이며, ‘은혜’인 동시에 ‘사명’이며, 진실한 믿음(True Faith)과 진실한 열매(True Fruit)를 동시에 요구한다.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구원의 양면이며, 둘 다 ‘진입함’과 ‘머무름’의 구조 안에서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계명에 대한 순종과 삶의 열매를 통해 완성해가야 한다.

교회와 세상, 현세와 내세, 신앙의 영역과 비신앙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이나 비역사적이고 내세주의적인 신앙관을 버리고 위대한 명령과 위대한 계명을 통합해야 한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위대한 명령과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을 받은 제자공동체는 온전히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는 능력을 통해 선교 지향적인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성직자를 포함해서 모두 평신도다. 평신도, 즉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었다면 제 2의 종교개혁은 사역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제주의적 권위주의를 버리고 은사적 평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바른 말씀의 선포(선지자적 사역, 케리그마)와 성례전(제사장적 사역, 치유와 회복), 정당한 권징(왕적 사역, 훈계와 징계)이 실현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속화되고 말씀이 없는 설교에서 말씀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가 이루어져야 하고, 성례전이 회복되며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성례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영적 권위를 가진 정당한 권징이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의 본질'과 '복음의 공공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은 '교회는 얼마나 세속사회 속에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교회의 타당성과 적합성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이 중에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공공성은 교회의 적합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하나(una)이고, 거룩(sancta)하며, 보편적(catholica)이고, 사도적(apostolica)인 교회이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는 공교회성을,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는 공공성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성은 '공교회성'과 '공공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공교회성 (개교회주의에서 공교회성으로)

개교회주의는 개교회가 스스로의 생존과 발전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목적을 개교회 자체와 외형적 성장에만 두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고 공교회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하나의 교회’(una ecclesia = One Church)를 믿는다는 말은 교회는 ‘일치성과 단일성’을 본질적으로 가진다는 고백이다. ‘교회의 보편성’은 보편적 교회, 세계적 교회, 우주적 교회임을 믿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모든 인종, 민족, 국가, 이념, 계급, 성별, 지역, 소유, 권력 등 모든 상대적 차이를 넘어서 하나 되어야 한다.
한 교회에 역사하는 성령이 아니라 한 지역에 역사하는 성령의 수위가 높아져야 한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연합하여 교회의 하나됨과 함께 지역을 책임지는 교회연합이 되어야 한다. 개교회와의 관계 전체를 넘어 ‘도시 전체’를 목회 대상으로 삼는 연합이어야 한다. ‘무지역 노회’가 아니라 ‘지역 노회’의 성격을 가진 연합 운동과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함께 성장하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연합이 되어야 한다.

교단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교단간 강단 교류뿐 아니라 교단별 연합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초교회나 세계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개신교를 대표하는 실질적 연합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하나의 지역 교회에서 기독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형교회 추구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기독교 사회’ 전체를 풍성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상호의존적 기독교 생태계’를 형성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교계 중심 패러다임’에서 ‘기독교 사회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게 되어 있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이다. 정체되고 고착되어 역사적 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붙들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타협 없는 변화를 이루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공동체성 (제도적 교회에서 공동체 교회로)



교회는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다. (딤전 3:15, 엡 2:19) 교회가 가족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바로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며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하는 관계, 즉 서로를 초대하고 거처를 제공하며 자신을 나누는 공동체적 관계, 무아적인 사랑의 힘으로 서로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게 되는 사귐의 관계로 존재하신다. 따라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삶의 스타일로 산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敎會)인 동시에 교회(交會)이다.
건강한 교회는 대그룹의 날개와 소그룹의 날개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그룹 모임을 통해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한다. 대그룹의 유익으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축제로서의 모임을 경험하는 것, 확대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 큰 규모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점,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의 경험이다. 그래서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예배에 목숨을 건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다른 날개는 ‘소그룹’이다. 소그룹 셀모임을 개척 초기부터 도입하여 사도행전적인 공동체적 삶을 나누고 교제와 섬김, 예배와 훈련, 전도가 셀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또한 셀이 사도행전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가족, 사역자,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체계적인 양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대형교회가 감당하는 사역과 작은 교회의 공동체성 둘 다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분리개척과 개척된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 사역이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인격적 교제, 인격적인 설교, 인격적인 성례, 인격적인 목양, 인격적 사역이 가능한 정도의 기준을 가진 적정규모(약 200-300여 명 정도)의 교회로 분립개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각자가 서로에 대해서 경쟁상대여서 ‘거래적 관계’만을 맺을 뿐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만남이 너무나 가볍고 일시적이며, 오직 서로를 수단화한다. 반면에 진정한 공동체는 ‘교환의 관계’가 아니라 ‘선물의 관계’를 맺는다. 공동체라는 뜻을 가진 community라는 말은 라틴어 ‘com’과 ‘munis’가 합쳐진 말이다.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munis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즉 공동체는 ‘선물을 함께 나누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다. 초대교회는 많이 거둔 자는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는 모자람이 없는 평등공동체를 이루었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초대교회처럼 소유를 넘는 공유의 공동체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복음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이다. 진정한 화해의 공동체를 만드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다. 특히 가정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초단위이기 때문이다. 가정을 소홀히 하며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지양하고,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우선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족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비전은 가족주의를 넘어선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다. 혈연적 가족공동체가 아니라 예수의 피로 맺어진 새언약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공공성 (종교적 세계에서 공공성의 회복으로)



한국교회는 세상을 닮았으면서도 세상과 동떨어진 종교적 세계에 갇혀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세속주의적 공리주의와 기복주의적 실용주의를 통해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 적응하며 세상을 욕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근본주의적 경건주의와 이원론적 내세주의를 통해 세상과 대립하며 세상과 불통하며 세상과 격리된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한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표지이며, 보증이요, 전조이며, 맛보기이다. 따라서 교회는 대조사회이며 대안사회이자 대항사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또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과 담을 쌓고 종교적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가 되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동안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근대 서구의 세계관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실과 가치’,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 ‘이성의 보편적 진리와 역사의 우연적 진리’가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오직 사적인 세계에서 믿음과 가치를 추구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이로인한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앙은 개인적(실존적)이지만 결코 사적이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이다.

우리를 진정으로 윤리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진정한 윤리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윤리는 자신이 행하지도 않은 어떤 잘못들에 대해 책임지는 데 있다. 자신이 행하지도 않은 어떤 잘못들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데서 온다. 또 하나 진정한 윤리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인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를 보는 인간이다. 자신이 가한 위해가 아닌데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죄책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다. 그러한 죄책을 느끼는 존재만이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인수하여 함께 고통을 짊어지고 심지어 타인의 죄책까지 인수하려는 대속적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양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였듯이 ‘타자를 위한 교회’여야 한다.

위험사회의 대안은 다시 ‘마을’이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핵가족’이 더 이상 개인을 지켜줄 수 없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사회를 ‘돌봄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모이고 떠들고 꿈꾸는 창의적 활동을 통해 마을을 만들어야 돌봄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마을 만들기의 비전을 위해 ‘페어라이프’를 키워드로 하는 다양한 사역을 해야 한다. 왜 ‘페어 라이프’인가? 페어(공정성)는 ‘신뢰’, ‘소통’, ‘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다. 페어는 ‘절차적 공정성'(미쉬파트에 가깝다)과 ‘실질적 공정성'(체데크에 가깝다)이 있다. 실질적 공정성은 1. ‘평등'(Equality)이다. 2. 형평성(Equity)이다. 3. 상호주의(호혜, Reciprocity)이다. ‘페어 라이프’란 공정성을 일상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특히 시민적 삶에서 공정성을 실현하는 삶이다.
정의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고, 사랑 없는 정의는 냉혹하다. 정의 없는 사랑은 값싼 은혜를 만들어내고, 사랑 없는 정의는 율법주의를 만들어 낸다. 공공성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비판성과 사랑의 창조성을 모두 가져야 한다. 공공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르상티망’의 비판능력만이 아니라 ‘창조성’의 실현이 요청된다. 창조와 종말의 ‘불연속성’만이 아니라 ‘연속성’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교회의 공공성은 바로 이런 창조성의 발현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다양한 창조적 실험이 만나고 실험되는 플랫폼으로 만들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미셔널 처치)



기독교 세계(크리스텐덤)가 해체되고 있다. 크리스텐덤은 20세기 말까지 적어도 11세기 동안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적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크리스텐덤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종교적 문화의 두 기둥이 되어 서로를 지탱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텐덤이 해체되었다. 지금은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이다. 따라서 크리스텐덤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교회론은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의 교회론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이다.
선교적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하지 않고 ‘성육신적’이 되려 한다는 점이다. 성육신적이라 함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만나려면 반드시 와야 하는 거룩한 장소를 따로 만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선교적 교회는 흩어져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사회의 틈과 갈라진 곳에 스며든다. 효율적으로 ‘안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와 보라.”가 아니라 “그들에게 가라”가 구호이다.
선교적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영성의 측면에서 이원론적이 아니라 ‘메시아적’이라는 점이다. 즉 그리스-로마 제국의 세계관이 아닌 메시야 예수의 세계관을 채택한다.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예수가 아니라 삶과 역사 한 가운데 계신 예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상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어 보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세상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를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본다.

선교적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은 리더십 형태의 측면에서 계급적이기보다는 ‘사도적’인 형태를 채택한다는 점이다. 사도적이라 함은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이 자세히 묘사한 5중 모델을 인정하는 리더십 형태를 말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삼각형식 계층 구조를 버리고, 현재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목양 및 가르치는 은사 외에도 전도와 사도직과 예언의 은사를 자유롭게 인정하는 성경적이고 수평적 리더십의 공동체를 말한다.
짐 벨처는 깊이 있는 교회를 강조한다. 선교적 교회와 전통 교회를 통합하라고 충고한다. 선교적 교회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추구하되 전통 교회의 형식이나 제도가 아닌 ‘본질적 이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