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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배타적인가? 순전한 기독교 1

작성자
gf21
작성일
2016-02-26 13:05
조회
4558
배타적인가?

 

4:12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기독교가 너무나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주장처럼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거나 혹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너무나 배타적으로 들린다고 한다. 또한 배타적인 것은 편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이런 배타성이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런 배타성이 종교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근대 세계의 출발에는 이런 종교전쟁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기도 있다.) 그들은 기독교가 진정 사랑의 종교라면 이런 배타성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이런 문제제기를 세부적으로 살펴보고, 역으로 그것을 반박함으로써 그러한 문제제기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1. 종교를 불법화하라.

종교가 배타적이라는 문제의식에 대한 해법은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종교를 금지시키는 것이다. 나치 독일 등은 국가가 종교를 잠식하거나 통제하려 했고, 구소련이나 동구, 공산 치하의 중국 등은 아예 종교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종교가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에 종교를 금지시키기로 결정한 사회의 역설은 종교를 금지시킨 결과 더 많은 평화와 안정을 이룬 것이 아니라 더 큰 억압과 폭력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가장 괴로운 역설은 불관용과 폭력의 원인이 종교라고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가장 극악무도한 불관용과 폭력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폭력과 불관용은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든 부정하려는 사람들이든 어떤 다른 이유에 의해 불관용과 폭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가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주장은 사회가 발전하면 종교는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소위 세속화 이론이라는 것인데, 종교를 계몽되지 않은 전근대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뿐인 일시적인 현상으로 본다. 사회가 세속화되고 문명이 더 진보하면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 자체는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즉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주장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지만 여전히 종교는 세상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선진국에서조차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종교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의 주장은 우리를 진화의 일부로만 보기 때문에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검증되지 않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하다.

 

2. 종교를 탓하고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설득하라.

종교의 배타성에 대한 두 번째 해법은 어차피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 축소시키고 힘을 잃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논쟁 등을 통해 건강한 상식을 심어주어서,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멈추게 하고, 각자의 종교가 모두 진리나 구원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라고 여기게 만들자고 한다. 이들의 주장들을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것들이 있다.

 

첫째, 모든 종교는 결국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의 교리적인 차이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고 핵심적인 것은 결국 동일하며 모두 동일한 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매우 배타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신관과 구원관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틱 냐한 스님, 프랑스 플럼빌리지 정문에는 예수상과 붓다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쓰기도 했다. 모든 종교는 똑같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가 기독교의 진리도 아니다. 불교식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이며, 불교의 교리로 해석한 진리일 뿐이다. 불교가 예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으로 인정하는가?

 

종교의 핵심적인 교리 간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있는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것을 너무 쉽게 건너뛴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매도한다. 이것이야말로 비상식적이며 배타적인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관용을 앞세운 독단이 거기에 숨어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비판하는 종교와 다른 방식으로 배타적일 뿐이다.

 

둘째, 종교 자체는 각각 영적 진리의 일부만 보는 것일 뿐 어떤 종교도 진리 전체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맹인과 코끼리의 비유를 많이 든다. 코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가 뱀과 같다고 말하고,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가 나무기둥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인데 자기가 본 것을 전체로 여기고 다른 주장들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바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모든 진리는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도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은 정도밖에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맹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뜬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은 맹인과 다르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독선이며 교만 아닌가?

 

셋째, 종교적 진리도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영향을 받은 상대적인 지식이므로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예전에는 모든 종교는 똑같이 진리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노골적으로 모든 종교는 똑같이 거짓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소위말해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깊이 논할 필요도 없다. 이미 철학적으로 모순적인 주장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상대주의는 오직 절대주의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주장이고, 회의론도 마찬가지다. 상대주의나 회의론이 참이려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어떤 주장도 참일 수 없다는 주장 자체는 절대적인 진리여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모든 것이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라면 상대주의도 참이 아닌 것이다.

 

3. 종교를 완전히 사적인 일로 묶어두라.

종교의 배타성에 대한 세 번째 해법은 어떻게도 종교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은 하되 철저히 사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방법이다. 어떻게든 종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그들은 종교를 오직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놓고, 종교는 단지 사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일 뿐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공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결코 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첫째는 공적인 이슈에 대한 세속적인 주장들도 그것이 도덕적인 주장인 한 궁극적인 가치 즉, 매우 종교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권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자.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진리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적인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적자생존 해야 하며 열등한 존재는 우등한 존재와 똑같은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결국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공적인 도덕은 상식처럼 쓰이지만 모두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종교적 신념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문제는 종교라는 것이 사실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거나 사적인 영역에 대한 해답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종교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삶과 세상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 체계다. 한마디로 그 안에 인생관과 세계관 혹은 서사적 정체성이 담겨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사적인 영역에서는 종교적이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세속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내 자아의 일부를 떼어놓고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폭력적이고 독선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주장은 매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문제제기 하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 그들이 주장하는 부정적인 종교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제기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되 우리만의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편으로 어떤 주장도 배타적인 성격이 없지 않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주장도 배타적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모든 주장이 배타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배타적인 면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모든 주장이 배타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배타적인 면을 가진 주장들 중 어떤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고 서로 이해하게 하며 대립을 넘어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가 권력의 종교, 기득권의 종교, 부자들의 종교, 탐욕의 종교, 전쟁의 종교로 타락하기 전,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이 나타났던 성경시대의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배타적인 종교만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대속물로 죽을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에 그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서 모든 막힌 담을 허셨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철학과 최고의 문명도 할 수 없었던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의 막힌 담을 헐고 진정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것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고백하는 배타적인 주장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능하게 하는 교리이며, 삼위일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사귐과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임을 보여주어야 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페리코레시스이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하나님께서 상호침투하고 상호내주하는 관계, 즉 서로를 초대하고 거처를 제공하며 자신을 나누는 공동체적 관계이며, 무아적인 사랑의 힘으로 서로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게 되는 사귐의 관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완전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자신을 내어주신다. 거기에는 배타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페리코레시스의 원뜻은 원무이다. 둥글게 돌아가면서 추는 춤을 말한다. 따라서 위일체는 하나의 춤이다. 춤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춘다. 원수하고 춤을 추지는 않는다. 원수하고는 싸울 뿐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에 오직 춤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춤을 추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기독교는 춤의 종교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처럼 춤을 출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과 다툼을 멈추고 모두가 함께 춤을 출 수 있도록 만드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배타적인 주장이야말로 삼위일체를 가능하게 하고 삼위일체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는 춤의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함께 춤추시지 않겠습니까? Shall we dance?”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전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