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 나라의 신학 (‘구속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의 통합)
개인의 죄와 내세의 문제만을 다루는 신학적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이슈와 공공적 사안에 대한 신학적 답을 갖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할 수 없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대안을 갖기 어렵다. ‘예수님에 관한 복음’(구속 신학)과 ‘예수님이 말한 복음’(하나님의 나라 신학)이 통합되어야 한다. 두 복음은 타원의 두 초점처럼 분리불가능하다.
- ‘개인 영혼 구원’에서 ‘통전적인 전우주적 회복’으로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해(희년)’을 선포하시고, 치유와 가르침과 선포를 통해 성취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성경은 개인 영혼 구원에 대한 협소한 구원이 아니라 통전적이고 전우주적인 회복이라는 비전을 구원으로 제시한다.
2. ‘공간적 개념’에서 ‘통치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죽은 후에 가는 내세적인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철저히 영육이원론과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헬라적이고 이방적인 개념일 뿐이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는 나라’이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주권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영역의 통치자가 되심을 의미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선교’의 현장이다.
3. ‘삶 이후의 삶’에서 ‘삶 이후의 삶 이후의 삶’으로
기독교의 구원의 목적은 ‘삶 이후의 삶’이 아니다. 죽어서 내세를 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모두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 기독교의 구원의 목적은 ‘삶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다. 바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룬 모든 성취는 헛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불타 없어져버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의 공력에 타서 없어지지 아니할 재료로 건축된다. 부활의 신앙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속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4. ‘제국적 질서’에서 ‘인자의 나라’로
마 16장과 막 8장에서 말씀하신 제자도는 ‘로마제국의 방식’, ‘황제의 방식’, ‘가이사랴 빌립보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 ‘인자의 방식’, ‘갈릴리의 방식’, 즉 십자가의 방식을 따르는 삶이다. 한 마디로 제국과 천국의 싸움 한복판에서 천국의 편에 서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 또한 예수님은 제국적 질서를 승인하고 유지하는 ‘시민 종교’와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민 종교를 통해 승인되고 유지되는 제국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5. ‘미래적 심판’에서 ‘지금 여기’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자기충족적이며 자기완성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권력과 부와 지식을 상대화하고 비판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며 현실을 변혁하며 새롭게 창조하면서 ‘미래의 현존’으로 ‘지금 여기에’ 도래하는 역사적 희망이다.
십자가의 영성 (번영과 탐욕의 영성에서 십자가의 영성으로)
한국 교회는 번영의 신학과 탐욕의 복음에 물들어 있다. 그렇기에 자기부인의 영성과 타자를 위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고, 가장 낮은 자들에게 나아가지 못하며 모순과 아픔이 있는 곳에 서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침묵’을 사고할 줄 모르고, 무신성의 한 가운데서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에 대해서 사고할 줄 모른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영성이 없다.
- ‘교리적 신념’에서 ‘살아야 할 삶의 양식’으로
십자가는 신비주의적이고 교리적인 신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양식’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으로서의 십자가가 없기에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가 너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는 싫은데 그리스도는 좋다고 말한다.
2. ‘권력과 지식’에서 ‘약함과 어리석음’으로
한국교회는 세상 나라를 닮아 ‘권력과 지혜’를 추구할 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 좁은 길로 나아가야 하는 ‘약함’과 ‘어리석음’의 십자가가 없다. 금, 은, 놋, 쇠,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상을 타격하여 부수고 흩어버리는 ‘손대지 아니한 돌’이며, 짐승의 나라를 파하고 그의 권세를 빼앗아 인자의 나라를 세우는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약함과 어리석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따라서 그의 몸된 교회는 약함과 어리석음을 통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3. ‘개인적 죄’에서 ‘정사와 권세로
기독교는 한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사와 권세’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룬다. 개인적 차원의 죄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의 죄의 문제를 다룬다. 십자가는 바로 정사와 권세의 폭력이 쏟아지는 현장이며 정사와 권세의 총공격이 이루어지는 현장이었고, 그 악과 죄와 폭력을 ‘대속적이고 비폭력적인 사랑의 희생’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고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 그리고 사랑과 정의의 나라를 이 땅에 새롭게 창조한 현장이었다.
4. ‘가해자의 죄를 용서하심’과 ‘피해자의 탄원을 신원하심’의 균형
십자가는 가해자의 죄와 죄책에 대한 용서와 회해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상처와 수치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선물한다. 피해자의 상실과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악의 실체를 드러내며, 사랑의 능력으로 승리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영광스럽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피해자의 탄원을 신원하여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무고한 자들의 핏소리를 듣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신원하고 화해시키는 능력을 발하는 자들이다.
5. ‘죄책감'(믿음과 은혜)과 ‘수치심'(순종과 신실함)의 통합
십자가는 ‘죄책감’ 뿐 아니라 ‘수치심’의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핵심에는 ‘수치’가 있다. (마 26:67-69. 막 15:16-19. 마 27:39-44.) 십자가가 수치심으로서의 죄책감을 다룬다는 것은 인간을 윤리적 존재로 본다는 말이다. 수치를 느끼는 자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죄에 자기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세상의 불의를 보고 자기도 거기에 연루되어 있기에 거기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수치를 느낀 자만 의분을 느낄 줄 알고 죄와 싸운다. 십자가의 수치를 짊어진 자는 세상의 죄에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아니하고 그 죄와 싸운다.
성령의 능력 (인간의 능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주체가 되기 원하셔서 보내신 분이 성령이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영이시며 자유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생명의 영이시며 평화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야만 영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 ‘시스템과 프로그램과 지식’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성공과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패와 연약함에 대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2. ‘개인적 성령의 역사’에서 ‘공동체적 성령의 역사’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은사의 영이시다. 오순절의 체험은 공동체적 체험이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 결과이다. 바벨의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백성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창설된 것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관계성과 사회성을 드러내는 영이시다.
3. ‘능력과 은사 중심’에서 ‘은사와 성품의 균형’으로
성령충만을 우리는 능력과 은사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능력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 은사적인 면과 성품적인 면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4. ‘탐욕적이고 반지성적인 성령운동’에서 ‘진리와 예수의 영’으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말씀과 진리가 없는 성령운동은 깨어짐이 없는 성령운동으로 흘러 십자가의 복음을 탐욕의 복음으로 만들며, 깨우침이 없는 성령운동으로 흘러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만든다. 또한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다. 성령의 근본적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요 16:14). 산사람 예수의 삶을 본받게 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 성령운동이 되어야 한다.
5. ‘제도와 관습에 갇힌 성령’에서 ‘선교의 영’으로
성령은 선교의 영이시기에 자신이 이미 선교하시는 영이시며,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영이시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만물과 인간 안에서 탄식하시는 영이시기에 우주와 역사 한 가운데서 종말을 선취하게 하며, 보내받은 자들로 하여금 신실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눅 24:46-49에 의하면 ‘메시야성’과 ‘선교성’은 신약에서 주장된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핵심사상임을 알 수 있다.
급진적 제자공동체
제자도를 잃어버리고, 값싼 은혜만을 남발하며,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어서 급진적인 윤리가 불가능하고 변혁적인 사회윤리도 없고 시대적 고민도 없는 한국교회의 회복은 제자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
- ‘소비자 중심적 복음’에서 ‘복음의 급진성과 불온성’으로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작게 만들고 싶어 하며,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한다. 소비자 중심적 교회에 다니는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우리가 다가가기에 편한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복음은 급진성과 불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사는 제자공동체는 복음의 체제전복적인 급진성과 세상을 소란케 하는 불온성을 가져야만 한다.
2. ‘믿음과 행위의 분리’에서 ‘온전한 순종과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Savior)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금이며 주인(Lord)되신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선포하고 온전히 살아야 한다. 복음은 ‘선물’인 동시에 ‘과제’이며, ‘은혜’인 동시에 ‘사명’이며, 진실한 믿음(True Faith)과 진실한 열매(True Fruit)를 동시에 요구한다.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구원의 양면이며, 둘 다 ‘진입함’과 ‘머무름’의 구조 안에서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계명에 대한 순종과 삶의 열매를 통해 완성해가야 한다.
3. ‘교회와 세상의 분리’에서 ‘위대한 명령과 위대한 계명의 통합’으로
교회와 세상, 현세와 내세, 신앙의 영역과 비신앙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이나 비역사적이고 내세주의적인 신앙관을 버리고 위대한 명령과 위대한 계명을 통합해야 한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위대한 명령과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을 받은 제자공동체는 온전히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는 능력을 통해 선교 지향적인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4. ‘사제주의적 권위주의’에서 ‘은사적 평등 공동체’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성직자를 포함해서 모두 평신도다. 평신도, 즉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었다면 제 2의 종교개혁은 사역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제주의적 권위주의를 버리고 은사적 평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5. ‘약화되고 왜곡된 교회의 표지’에서 ‘바르고 정당한 교회의 표지’로
바른 말씀의 선포(선지자적 사역, 케리그마)와 성례전(제사장적 사역, 치유와 회복), 정당한 권징(왕적 사역, 훈계와 징계)이 실현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속화되고 말씀이 없는 설교에서 말씀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가 이루어져야 하고, 성례전이 회복되며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성례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영적 권위를 가진 정당한 권징이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의 본질’과 ‘복음의 공공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은 ‘교회는 얼마나 세속사회 속에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교회의 타당성과 적합성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이 중에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공공성은 교회의 적합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하나(una)이고, 거룩(sancta)하며, 보편적(catholica)이고, 사도적(apostolica)인 교회이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는 공교회성을,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는 공공성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성은 ‘공교회성’과 ‘공공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공교회성 (개교회주의에서 공교회성으로)
개교회주의는 개교회가 스스로의 생존과 발전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목적을 개교회 자체와 외형적 성장에만 두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고 공교회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 ‘개교회주의’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로
‘하나의 교회’(una ecclesia = One Church)를 믿는다는 말은 교회는 ‘일치성과 단일성’을 본질적으로 가진다는 고백이다. ‘교회의 보편성’은 보편적 교회, 세계적 교회, 우주적 교회임을 믿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모든 인종, 민족, 국가, 이념, 계급, 성별, 지역, 소유, 권력 등 모든 상대적 차이를 넘어서 하나 되어야 한다.
2. ‘경쟁적 성장주의’에서 ‘지역 연합 중심의 동반 성장’으로
한 교회에 역사하는 성령이 아니라 한 지역에 역사하는 성령의 수위가 높아져야 한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연합하여 교회의 하나됨과 함께 지역을 책임지는 교회연합이 되어야 한다. 개교회와의 관계 전체를 넘어 ‘도시 전체’를 목회 대상으로 삼는 연합이어야 한다. ‘무지역 노회’가 아니라 ‘지역 노회’의 성격을 가진 연합 운동과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함께 성장하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연합이 되어야 한다.
3. ‘교단간 분열’에서 ‘교단별 연합운동(에큐메니컬)’으로
교단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교단간 강단 교류뿐 아니라 교단별 연합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초교회나 세계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개신교를 대표하는 실질적 연합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4. ‘개교회와 교단 중심주의’에서 ‘기독교 생태계 복원’으로
하나의 지역 교회에서 기독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형교회 추구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기독교 사회’ 전체를 풍성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상호의존적 기독교 생태계’를 형성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교계 중심 패러다임’에서 ‘기독교 사회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5. ‘정체된 고정적 조직’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게 되어 있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이다. 정체되고 고착되어 역사적 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붙들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타협 없는 변화를 이루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공동체성 (제도적 교회에서 공동체 교회로)
- ‘제도적 종교조직’에서 ‘삼위일체적 코이노니아’로
교회는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다. (딤전 3:15, 엡 2:19) 교회가 가족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바로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며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하는 관계, 즉 서로를 초대하고 거처를 제공하며 자신을 나누는 공동체적 관계, 무아적인 사랑의 힘으로 서로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게 되는 사귐의 관계로 존재하신다. 따라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삶의 스타일로 산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敎會)인 동시에 교회(交會)이다.
2. ‘기업적 대형교회’에서 ‘양날개 교회’로
건강한 교회는 대그룹의 날개와 소그룹의 날개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그룹 모임을 통해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한다. 대그룹의 유익으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축제로서의 모임을 경험하는 것, 확대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 큰 규모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점,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의 경험이다. 그래서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예배에 목숨을 건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다른 날개는 ‘소그룹’이다. 소그룹 셀모임을 개척 초기부터 도입하여 사도행전적인 공동체적 삶을 나누고 교제와 섬김, 예배와 훈련, 전도가 셀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또한 셀이 사도행전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가족, 사역자,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체계적인 양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3. ‘개교회 성장주의’에서 ‘지속가능한 적정 규모의 번식’으로
더불어숲동산교회는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대형교회가 감당하는 사역과 작은 교회의 공동체성 둘 다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분리개척과 개척된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 사역이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인격적 교제, 인격적인 설교, 인격적인 성례, 인격적인 목양, 인격적 사역이 가능한 정도의 기준을 가진 적정규모(약 200-300여 명 정도)의 교회로 분립개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 ‘교환의 공동체’에서 ‘선물의 공동체’로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각자가 서로에 대해서 경쟁상대여서 ‘거래적 관계’만을 맺을 뿐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만남이 너무나 가볍고 일시적이며, 오직 서로를 수단화한다. 반면에 진정한 공동체는 ‘교환의 관계’가 아니라 ‘선물의 관계’를 맺는다. 공동체라는 뜻을 가진 community라는 말은 라틴어 ‘com’과 ‘munis’가 합쳐진 말이다.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munis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즉 공동체는 ‘선물을 함께 나누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다. 초대교회는 많이 거둔 자는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는 모자람이 없는 평등공동체를 이루었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초대교회처럼 소유를 넘는 공유의 공동체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5. ‘가정과 교회의 대립’에서 ‘회복된 가정과 확대된 가정의 균형’으로
복음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이다. 진정한 화해의 공동체를 만드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다. 특히 가정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초단위이기 때문이다. 가정을 소홀히 하며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지양하고,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우선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족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비전은 가족주의를 넘어선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다. 혈연적 가족공동체가 아니라 예수의 피로 맺어진 새언약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공공성 (종교적 세계에서 공공성의 회복으로)
- ‘세속적이면서 배타적인 교회’에서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로
한국교회는 세상을 닮았으면서도 세상과 동떨어진 종교적 세계에 갇혀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세속주의적 공리주의와 기복주의적 실용주의를 통해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 적응하며 세상을 욕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근본주의적 경건주의와 이원론적 내세주의를 통해 세상과 대립하며 세상과 불통하며 세상과 격리된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한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표지이며, 보증이요, 전조이며, 맛보기이다. 따라서 교회는 대조사회이며 대안사회이자 대항사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또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과 담을 쌓고 종교적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가 되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동안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사적 신앙’에서 ‘공적 신앙’으로
근대 서구의 세계관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실과 가치’,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 ‘이성의 보편적 진리와 역사의 우연적 진리’가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오직 사적인 세계에서 믿음과 가치를 추구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이로인한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앙은 개인적(실존적)이지만 결코 사적이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이다.
3. ‘자신을 위한 교회’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로
우리를 진정으로 윤리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진정한 윤리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윤리는 자신이 행하지도 않은 어떤 잘못들에 대해 책임지는 데 있다. 자신이 행하지도 않은 어떤 잘못들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데서 온다. 또 하나 진정한 윤리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인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를 보는 인간이다. 자신이 가한 위해가 아닌데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죄책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다. 그러한 죄책을 느끼는 존재만이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인수하여 함께 고통을 짊어지고 심지어 타인의 죄책까지 인수하려는 대속적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양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였듯이 ‘타자를 위한 교회’여야 한다.
4. ‘불평등과 부정의’에서 ‘페어라이프'(공평과 정의)로
위험사회의 대안은 다시 ‘마을’이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핵가족’이 더 이상 개인을 지켜줄 수 없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사회를 ‘돌봄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모이고 떠들고 꿈꾸는 창의적 활동을 통해 마을을 만들어야 돌봄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마을 만들기의 비전을 위해 ‘페어라이프’를 키워드로 하는 다양한 사역을 해야 한다. 왜 ‘페어 라이프’인가? 페어(공정성)는 ‘신뢰’, ‘소통’, ‘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다. 페어는 ‘절차적 공정성'(미쉬파트에 가깝다)과 ‘실질적 공정성'(체데크에 가깝다)이 있다. 실질적 공정성은 1. ‘평등'(Equality)이다. 2. 형평성(Equity)이다. 3. 상호주의(호혜, Reciprocity)이다. ‘페어 라이프’란 공정성을 일상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특히 시민적 삶에서 공정성을 실현하는 삶이다.
5. ‘사랑과 공의의 분열’에서 ‘사랑과 공의의 균형’으로
정의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고, 사랑 없는 정의는 냉혹하다. 정의 없는 사랑은 값싼 은혜를 만들어내고, 사랑 없는 정의는 율법주의를 만들어 낸다. 공공성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비판성과 사랑의 창조성을 모두 가져야 한다. 공공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르상티망’의 비판능력만이 아니라 ‘창조성’의 실현이 요청된다. 창조와 종말의 ‘불연속성’만이 아니라 ‘연속성’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교회의 공공성은 바로 이런 창조성의 발현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다양한 창조적 실험이 만나고 실험되는 플랫폼으로 만들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미셔널 처치)
- ‘크리스텐덤’에서 ‘포스트-크리스텐덤’으로
기독교 세계(크리스텐덤)가 해체되고 있다. 크리스텐덤은 20세기 말까지 적어도 11세기 동안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적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크리스텐덤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종교적 문화의 두 기둥이 되어 서로를 지탱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텐덤이 해체되었다. 지금은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이다. 따라서 크리스텐덤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교회론은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의 교회론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이다.
2. ‘제도적 교회'(모이는 교회)에서 ‘성육신적 교회'(흩어지는 교회)로
선교적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하지 않고 ‘성육신적’이 되려 한다는 점이다. 성육신적이라 함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만나려면 반드시 와야 하는 거룩한 장소를 따로 만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선교적 교회는 흩어져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사회의 틈과 갈라진 곳에 스며든다. 효율적으로 ‘안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와 보라.”가 아니라 “그들에게 가라”가 구호이다.
3. ‘전통적 교회’에서 ‘이머징 교회'(메시아적 교회)로
선교적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영성의 측면에서 이원론적이 아니라 ‘메시아적’이라는 점이다. 즉 그리스-로마 제국의 세계관이 아닌 메시야 예수의 세계관을 채택한다.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예수가 아니라 삶과 역사 한 가운데 계신 예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상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어 보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세상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를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본다.
4. ‘조직적 교회’에서 ‘유기체적 교회'(사도적 교회)로
선교적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은 리더십 형태의 측면에서 계급적이기보다는 ‘사도적’인 형태를 채택한다는 점이다. 사도적이라 함은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이 자세히 묘사한 5중 모델을 인정하는 리더십 형태를 말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삼각형식 계층 구조를 버리고, 현재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목양 및 가르치는 은사 외에도 전도와 사도직과 예언의 은사를 자유롭게 인정하는 성경적이고 수평적 리더십의 공동체를 말한다.
5. ‘양극단의 교회’에서 ‘깊이 있는 교회’로
짐 벨처는 깊이 있는 교회를 강조한다. 선교적 교회와 전통 교회를 통합하라고 충고한다. 선교적 교회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추구하되 전통 교회의 형식이나 제도가 아닌 ‘본질적 이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숲동산교회의 시작
더불어숲동산교회(이도영목사)는 2010년 1월에 개척하여 현재 (2015년 10월) 출석교인 250여명(장년 150여명, 주일학교 100여명) 규모의 교회이다. ‘더불어숲’은 한 그루의 나무로는 산을 푸르게 할 수 없고 크고 작은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루어야 산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하나의 교회가 아무리 커도 지역사회를 섬기고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으니 지역의 교회들이 같이 연합하여 큰 숲을 이루자는 소망을 품고 있는 이름이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이원타워빌딩 10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태, 협동, 공유, 평화, 영성 등의 가치로 디자인된 공간의 절반은 예배당으로, 나머지 절반은 카페, 어린이 도서관, 마을서재로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숲동산교회의 비전
교회를 설립한 지 6년차인 신생교회이지만 비전을 세우고, 비전에 따라 충실하게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교회의 비전은 “한국 교회에 주신 다양한 영적 전통을 통합하고, 10년 후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십자가의 영성과 성령의 능력을 갖춘 급진적 제자공동체를 통해 공교회성과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선교적 교회”이다. 이도영목사 자신이 전통교회 영성인 제자양육, 내적 치유, 셀공동체,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고, 동시에 다일공동체운동과 새날공동체운동과 사회변혁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진보적인 사회 참여를 경험하면서 한국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다양한 영적 전통들을 통합하는 교회를 꿈꾸고 있다.
공동체성의 회복1 – 예배의 회복
비전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공동체를 통해 초대교회에서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을 지금도 경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대그룹 예배와 소그룹 모임이라는 두 날개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예배에 목숨을 건다. 이러한 바램은 교회 공간에도 잘 나타난다. 공간이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생각 하에 도심 속에서 빌딩 10층에 자리잡은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예배 공간은 카페 등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과 철저히 분리했다. 개척교회의 경우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주 중에는 성도와 지역 주민을 위한 교제 공간으로 사용하고 주일에는 예배공간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이와 달리 예배 공간에는 일체의 다른 것들은 배제한 순수 예배 공간을 고집하는데 이는 성도들이 예배에 제대로 몰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평일의 경우 이 공간 또한 지역에 오픈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교회는 그냥 모임이거나 조직일 뿐 영적 공동체가 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성령의 기름부음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와 기도회를 드리고 있다. (미셔널 처치와 리미널 처치의 통합을 이루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그룹이 내향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기에 올해부터는 가족공동체의 친목을 도모하는 ‘전교인수련회’ 대신 경남 상주시 석산교회 주변 10개의 마을에 마을잔치, 이미용봉사, 노후한 주택 리모델링 등으로 이웃을 섬기는 <봉사수련회>를 다녀왔다.
공동체성의 회복2 – 소그룹의 회복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다른 날개는 ‘소그룹’이다. 이전 교회에서의 셀교회 경험을 바탕으로 소그룹 셀모임을 개척 초기부터 도입하여 사도행전적인 공동체적 삶을 나누고 교제와 섬김, 예배와 훈련, 전도가 셀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이웃을 초청하는 <행복파티>를 통해 전도를 하고 있지만 전도의 핵심은 셀모임으로 이웃을 초청하는 <셀행복파티>와 ‘열린셀’이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셀에 참여하다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상당수일 정도로 셀들이 공동체를 경험하고 있으며, 셀공동체를 통해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 셀은 이미 3개의 셀로 분가하였고 현재도 3-4명의 불신자가 참여하고 있다. 또한 셀이 사도행전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가족, 사역자,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체계적인 양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신앙기초반(성경학교, 기도학교), 4단계 셀양육과정(신앙기초과정 – 내적치유수양회 – 신앙성숙과정 – 지도자훈련과정), 제자훈련과정 등이 그것이다. 2014년부터는 ‘독서제자훈련’을 통해 깊이 있는 제자훈련을 진행하고 있으며, 90일 성경통독을 통해 성경 전체의 구원내러티브에 대해 배우고 있다.
공동체성의 회복3 – 건강하고 작은 교회의 분립
더불어숲동산교회는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성도 수가 많은 대형교회는 초대교회처럼 자기 것을 내어 놓는 유무상통의 코이노니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과 교제가 드러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소그룹 운동에 열심을 내지만 작은 규모가 주는 공동체성은 거의 살리기 어렵다. 반면 대형교회는 큰 규모의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작은 교회들이 할 수 없는 사역을 감당하는 장점도 있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이런 점에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까? 대형교회가 감당하는 사역과 작은 교회의 공동체성 둘 다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분리개척과 개척된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 사역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비록 개척교회 수준이지만 벌써부터 절기 헌금의 절반을 분리개척헌금으로 적립하고 있다. 교회 규모가 300여 명이 넘으면 분립개척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게 개척된 교회들은 교회 예산의 10%를 공공기금으로 내어 연합사역을 통해 대형교회의 사역 효과를 내자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 universal-church), 즉 공교회성을 지향하는 비전의 실천이기도 하다. 이런 공교회성 회복의 실천을 위해 절기헌금의 절반으로 더 어려운 개척교회를 섬겨왔고, 현재 지역 내 교회들의 연합 사역을 준비 중이다.
공공성의 회복1 – 마을만들기
더불어숲동산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비전 중 하나는 공공성이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한국교회가 지역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마을 만들기 운동이다. 이를 위해 더불어숲동산교회는 개척 전에 개척멤버들과 함께 ‘성미산마을’을 탐방하며 ‘공공성’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였으며, 개척 시작부터 비록 크지는 않지만 교회 공간의 절반을 지역 사회를 위한 카페, 마을 서재, 어린이 도서관 등으로 내어 놓고 있다. 개척을 하면서 지역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사전에 조사한 결과, 30-40대의 인구 비중이 높고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일반 카페보다는 어린이를 위한 공간에 초점을 두면서 어린이 도서관을 시작했다. 도서관도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라 시에 정식 등록할 만큼 제대로 운영하고 있다. 자발적 기부와 공유로 만든 마을 서재는 마을의 공유공간으로서 어른들이 와서 편안하게 책도 읽고 담소도 즐기며 때로는 마을을 위한 회의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고, 대안 모색을 위한 인문학 콘서트도 진행했다. 카페는 교회 성도들이 활용하는 공간을 넘어 지역 주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들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공정무역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공공성의 회복2 – 페어라이프 센터
1) 현재는 카페, 어린이 도서관, 마을 서재 등을 묶어 정식 NGO인 페어라이프 센터를 운영 중이다. 지속가능하고 참여하고 소통하는 마을만들기를 꿈꾸는 페어라이프센터는 지역사람들과 소통하는 공간인 카페에서 공정무역을 하고, 바자회나 벼룩 시장, 크리스마스 마켓 등을 열고, 그 수익금으로 외국의 분쟁지역 등에 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일이나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하기도 하고, 많은 워크숍과 문화학교 등을 통해 지역을 섬기고 있다.
2) 페어라이프센터는 지역의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작은 예술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토요일만 열리는 예술학교는 2013년 경기문화재단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성도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배우고, 직접 노랫말을 만들고, 음악을 작곡하고, 뮤지컬 각본을 쓰고, 춤을 배우는 과정에서 대안적 가치를 배우고 있고, 창작 뮤지컬 공연까지 마쳤다. 2014년에는 제주도 공정여행과 대안교육, 그리고 <빅이슈>아저씨들과 함께 합창 발표를 하였다. 2015년에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야심차게 밀고 있는 <꿈의 학교>로 전환하여 ‘마을 공동체 교육’이라는 신개념의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 화성 유일의 <꿈의 학교>가 내년에는 여러 곳에서 열리도록 하는 일(화성시청)을 돕게 되어 있다.
3) 페어라이프센터는 그동안 봉사자들로 운영하고 있던 ‘공정무역 카페’를 화성시 최초로 35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화성시 제 1호, 사회적 협동조합 더불어숲’으로 전환하여 사회적 경제를 일구며 취약계층을 돕고 지역사회 재생과 공익증진에 힘쓰고, 지역사회를 위한 마을 만들기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조합원들 중 일부가 자발적으로 청소협동조합 <사람과 청소>를 만들어 새로운 협동조합 모델을 시험하고 있다.
4) 지역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페어라이프 센터 공간을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여 ‘마을의 공유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쿡 창의요리 연구소’에서 ‘동화쿡 요리쿡(3회)’을, ‘화성환경운동연합’에서 ‘숲 안내자 양성과정(8회)’을 진행했고, ‘화성시 보육교직원 교육’ 같은 굵직한 세미나들과 화성시 <창의지성센터>의 강의가 화성시에서 진행하는 세 곳 중 하나로 지정되어 교회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자체적으로 진행하던 <마을학교>를 ‘화성의제21 실천협의회’와 함께 ‘마을,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라는 주제로 진행하여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의 강의와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개최했다. 올 해도 전체 프로그램 중 정승관(전 풀무고 교장) 선생님, 이화숙(로봇다리 세진이 어머니) 씨의 교육특강과 임완수 박사를 모시고 진행하는 ‘커뮤니티 맵핑’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어 있다. 최근에는 <공정무역교실>을 통해 ‘공정무역강사’를 양성하여 지역학교의 강사로 자유학기제 특강 강사로 섬기도록 하고 있다.
5)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사회 이슈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을 모색하고 함께 공부하며 함께 참여하는 ‘사회선교부’를 만들어 교회의 사회참여에 기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는 반드시 정치적 이슈에도 관여해야 하지만 교회 전체가 이슈에 참여할 경우 자칫 당파적 공동체가 되기 쉽기에 ‘사회선교부’를 만들어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적 이슈에 기독교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더불어숲동산교회 조직원리
조직 운영 측면은 더불어숲교회의 정관에서 몇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담임목사의 임기는 6년이고 공동의회에서 유효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연임하도록 되어 있다. 장로는 시무장로로 4년간 봉사하며 공동의회에서 유효 투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1회에 한해 중임을 한다. 당회와 제직회와 같이 전통적인 교회 조직 이외에 운영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운영위원회는 담임목사, 남녀 총지역장, 각 국장(부서장)으로 구성되며 매월 개최하여 교회의 주요 안건을 논의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교회 정관의 제정, 개정 및 폐지에 대한 제안과 토론을 하는 역할을 한다. 재정운영의 원칙도 정관에서 정하고 투명하게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회재정은 선교, 사회봉사, 교육 및 교회운영의 몫은 서로 균형 있게 배분되어야 하고 잉여분이 발생하면 선교 및 구제에 우선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재정은 각 국(부서)를 중심으로 집행되고 독립 운영한다. ‘은사적 평등공동체’라는 운영원리에 맞게 진행하기 위해 지금도 변화를 겪고 있다.
더불어숲동산교회에 대한 회고
더불어숲동산교회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생존의 고비를 여러 번 겪었다. 전통적인 교회와는 너무나 다른 비전과 사역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아 개척 멤버 대부분과 많은 성도들이 떠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새로운 대안적 공간을 만들려면 우리와 다른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한다. 비슷한 성향과 가치와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만족적인 운동을 해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오래 참음’과 ‘온유’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인내와 온유의 공동체’를 만들려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환멸을 견뎌내는 능력’과 ‘반대를 품는 것에 대한 환멸을 견디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환멸을 견디는 능력’이다. 오늘날까지 이도영 목사는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비전을 설명하고, 비전 수련회, 비전회의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교회가 비전을 향해 나아갈 방향을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비전을 공유하면서 여러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해는 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숲동산교회는 비전 그대로 10년 후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가 되는 것을 향해 오늘도 열심히 도전하고 있는 교회이다.
(류지성 박사님과의 인터뷰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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