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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성경은 불신적인가? 순전한 기독교 5]]> 불신적인가?   딤후 3:16 여러분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 성경에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성을 가진 자이면서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1. 과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판단할 수 없다. 현대인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경의 이야기는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꾸며낸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정말 타당할까?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문제제기를 받을 때 수세적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인 논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 후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듯 주장하지 말고 그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를 논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검증 가능한 것만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지식 자체도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모든 백조를 다 조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검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하면 과학적인 지식도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칼 포퍼가 반증가능한 진술만을 과학적 진술이라고 했고,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지식은 사이비라고 했다. 과학적인 지식도 반증가능한 진술이므로 절대적 지식이라고 할 수 없고, 반증가능하지 않는 진술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멘? 과학자들이 겸손해지기 시작한 것 같지 않은가? 이 이론에 의하면 신앙의 지식은 반증가능한 지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반증할 수 있겠는가? 과학의 영역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판단할 수 없다. 현대인들이 볼 때 기적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연의 질서라는 것이 과연 기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질서라는 것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반증할 수 있는가?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반증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도 과학적으로 기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성경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태도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관이 다르면 동일한 실험을 통해서도 관찰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과학적 지식도 신앙처럼 믿음의 체계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파이어아벤트라는 세계적인 과학철학자는 과학에 인식적인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되며 다른 지적 전통들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이나 종교나 신화 등 모든 지식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야 과학이 겸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결코 과학에 주눅 들지 말라.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렇다고 해서 기적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서 너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의 이야기들은 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경탄의 대상이며 동시에 구원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자연 질서의 정지 또는 파괴가 아니라 자연 질서의 회복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나라이다.   기적을 대할 때 이런 메시지를 읽어야 하고, 이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 복음으로 이 세상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면 여러분은 기적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기적이다. 기적적인 기도의 응답만큼이나 자기의 탐욕을 포기하는 것이 기적이다. 1001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100이 함께 협동하는 것이 기적이다. 돌을 빵이 되게 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다. 죄로 인해 망가진 것을 회복하는 그것이 곧 기적이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삶으로써 기적을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2.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과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의 문제 때문에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기적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부활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장 강력한 반발은 성경이 매우 초창기에 저작된 것이라는 사실, 즉 먼 시대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창기에 쓰였다는 말은 그 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밝혀낼 사람들이 많은 상태에서 책이 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죽은 지 길어야 40~60년 후에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책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야기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 사후 15~25년 사이에 쓴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건들을 개략적으로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이 정부의 관리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증언하면서 이미 대중들이 다 아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아그리파 왕에게 말했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이 수천 수만 명이 있다는 말이다.   부활은 어떤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는 부활의 목격자들을 열거하고 있다. 목격자들이 많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는 제자들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제자들을 붙잡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성경의 저자인데, 실제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지만 사람들이 믿게 해야 하는 작가라고 상상해보자. 더군다나 그 작가는 자신을 그 지어낸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의 제자로 묘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수장으로 있는 종파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되도록이면 가짜라는 것이 들통 나지 않게 하려고 쓴 책이라고 하기에는 어리숙한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옆에서 도왔던 사람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식으로 목격자들의 이름을 너무 많이 언급한다. 이름을 많이 말할수록 거짓말이 들통 날 가능성이 높다.   초대교회 당시 최대의 이슈인 할례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없다. 작가가 너무 어리숙하다. 당연히 넣어야 하는데 없다면 예수님이 진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넣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교주를 미화해야 하는데, 왜 작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연약한 모습을 그렸을까? 또 십자가 위에서 왜 나를 버렸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모습은 어떤가? 당시에 여자의 지위는 형편없었기 때문에 여자의 증언은 증거로 채택되지도 않는 사회에서 왜 하필이면 부활의 목격자를 여자로 설정했을까? 뿐만 아니라 한 종파를 움직여야 하는 리더들을 왜 구제불능의 문제아들로 그린 것일까?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리숙한 글 투성이다.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인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등을 저술한 세계적인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복음서가 자신이 평생 동안 연구한 시, 소설, 환상문학, 전설, 혹은 신화와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복음서의 문학적 양식은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르포르타쥐, 즉 현장보고이든지, 아니면 우리 시대의 사실적인 내러티브 기술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사실적인 방식으로 쓰여지는 우리 시대의 소설의 역사는 300년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전에 쓰여진 전설이나 신화 중 어떤 것도 복음서의 문학적 형식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성경은 현장보고서라는 말이다. 진짜 발생한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쓴 책이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모든 성경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러분은 정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 일반 소설이나 교훈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이 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실체화된다.   솔직히 교회에 대해 절망할 때가 있었다. 마음이 너무 힘들고 지치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모든 것이 안 될 가능성으로만 보였다. 교회를 상가에서 시작한 것, 입주할 때 개척하지 못한 것, 비전을 함께 나누지 못한 사람들과 시작한 것, 나의 부족함과 지체들 간의 갈등.. 등등. 열심히 하면 할 수록 더 절망스러웠다. 그 때 로마서를 읽었다. 4:4-5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확실한 깨달음을 주셨다. ‘영적인 일의 결과는 내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주시는구나.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서 성취한 것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 복음이구나.’ 이렇게 깨닫게 되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게 되고,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니까,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되더라.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기적이 이러났던 것처럼 오직 말씀에 의지하기 바란다.]]> Fri, 26 Feb 2016 14:32:51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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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기독교는 가혹한가? 순전한 기독교 4]]> 가혹한가?   3:25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중 하나는 지옥과 심판에 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냥 용서해주면 되지 누굴을 죽이고 나서야 분이 풀리는 하나님이라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왜 지옥이라는 걸 만들어서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그것에 처넣는가? 그것은 일반적인 죄의 형평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한다. 지옥의 형벌을 면한 우리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욱 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믿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의문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정서상 이렇게 가혹해 보이는 신앙의 요소는 거부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과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누리기를 추구한다. 심지어는 옳고 그름조차도 개인이 결정하려는 문화이기에 신앙인조차도 자신을 불편하게 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거스르는 내용이라면 그것이 성경이라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더욱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 결국 지옥이나 심판의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된 문제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진노를 내리시겠는가? 이것이 바로 문제의 골자다. 이런 문제제기가 가능한 이유는 현대인들의 사랑이 너무 낭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사랑은 부드럽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분노에 가득 찰 수 있으며, 사랑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분노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한 번 상상해보라.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행동이나 관계로 인해 피폐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평화로운가? 아니면 분노로 가득 차는가? 어떤 악한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해하려고 할 때 혹은 이미 해를 가하고 있을 때 여러분의 감정은 무엇인가? 분노의 감정은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신은 왜 분노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왜 질투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시기질투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시기는 남의 물건을 향해 악한 눈을 던지며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강한 충동이지만, ‘질투는 타인이 던지는 악한 눈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소유물을 지켜내려는 욕구다. 결국 시기는 수치스러운 강점인 반면 질투는 명예로운 감정인 것이다. 히브리어로도 시기는 악한 눈을 의미하는 아인 라를 사용하지만 질투킨아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질투와 같은 저차원적인 것이거나 시기와 같은 악한 감정이 아니라 사탄이 던지는 시기의 공격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보물을 보호하려는 거룩한 감정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해하려는 죄악과 사탄에 대해 분노하며, 죄악과 사탄에 대해 단호하게 심판하려 한다. 사랑과 정의가 뗄래 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측면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이다. 12:18-19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거룩한 정의를 행하실 것이라는 확신, 즉 내가 용서하는 자가 돌이키거나 자신의 죄과를 감당하거나 어그러진 것들이 바로잡힐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런 확신이 서게 되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자신이 직접 심판하기 위해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며, 폭력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2. 죄가 이미 지옥이다.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해보자.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진노나 심판이 필요 없지 않은가라는 문제제기는 사랑에 대한 오해만이 아니라 죄와 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죄나 악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모든 것을 단지 정신적인 질병 정도로 이해한다. 단순한 질병이나 실수 정도를 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범한 잘못 이상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는 죄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잃는 문제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냥 용서해주면 되지 왜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가능한 것은 죄악을 죄악으로 보지 않고 자기 생명과 직결된 문제로 보지 않고 단순히 실수나 정신적 질병 정도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실을 회피하려는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죄악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독립의지이며,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을 앉히고자 하는 거역의 의지이며,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찬탈이다. 이런 사람 안에 있는 것은 철저히 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자기 사랑뿐이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영혼을 도로 찾으면 자신의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의 말을 들어보자.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온통 뿐이다. 이 자기 사랑과 자기 몰두가 바로 죄악이다. 이렇게 자기 몰두와 자기 사랑은 자기의 가치를 증명해 줄 제물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우상을 필요로 한다. 결국 자기 사랑과 자기 몰두는 우상에 대한 몰두와 우상에 대한 사랑에 불과하다. 결국은 우상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우상을 닮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자아를 잃어버린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이제 오직 우상만 남아 탐욕과 허무의 덩어리가 된다. 깊은 심연의 허무와 불처럼 타오르는 탐욕의 덩어리가 된다. 이런 사람의 내면과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을 거절하는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이미 심판 가운데 있다. 최종적 심판은 이미 주어진 심판의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잘못과 실수를 하는 자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림으로써 이미 심판 가운데 있는 것들이 열매를 맺도록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신이 한 것이라고는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 스스로가 가장 갈구하고 있는 바를 주는 것뿐이다.   3. 십자가의 자리바꿈 ,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초래하는 죄악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참으로 심각한 죄들이 있다. 여러분의 자녀를 처참하게 죽인 살인자가 있다 하자. 그런데 가해자는 죄에 대한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있는데, 혹은 앞으로 영원토록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 확실한데, 누군가가 당신에게 사랑으로 그냥 용서해주라고 말한다 하자. 이런 요구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은가?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진정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또 하나가 있다. 만약 가해자가 감옥에 갇혀 죄의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여러분의 자녀가 돌아오는가? 자녀의 부재로 인한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닌가? 용서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아픔을 그에게 쏟아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 모든 아픔을 자신이 감내하는 대가를 치루는 것과 같다. 가해자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겪는 것이다. 그냥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감내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한다.   , 그렇다면 우리의 죄에 대한 해결은 어떻게 처리되는 걸까? 우리의 궁극적인 죄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 죄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는 동시에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셔야만 한다.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다. 인간에게 부과되어야 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으셨.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용서하면 되지 왜 하나님은 자식에게 화풀이 하느냐고 비아냥거린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비아냥거림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자기 자신이 형벌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맛보는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렇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아들에게 전가되게 하셔서 우리를 용서하셨고, 아들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를 통해 하나의 위대한 교환이 일어난 것이다. “죄악의 본질은 우리 인간이 신을 대체하는 것이며, 반대로 구원의 본질은 신이 몸소 우리를 대체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신만이 있을 수 있는 곳에 우리 자신을 갖다가 놓았지만, 신은 인간이 있어 마땅한 곳에다 스스로를 갖다 놓는다.” 완전한 의인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의 자리로 자리바꿈을 하심으로 완전한 죄인이요 부정한 자였던 우리가 의인의 자리로 자리바꿈 되었다. 그렇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께서는 악의 세력들을 정복하셨고, 새로운 나라를 출범시키셨다.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간다.]]> Fri, 26 Feb 2016 14:25:30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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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기독교는 불의한가? 순전한 기독교 3]]> 불의한가?   2:8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보이고 있는 불의한 모습과 폭력적인 모습과 위선적인 모습들이다. 특히 요즘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세상 사람들이 훨씬 친절하고 훨씬 더 도덕적인 사람들이 많고 교회는 도리어 광신도와 위선자와 불의한 자들이 많다고 한다. 교회가 싫어서 교회를 탈출한 가나안 성도가 100만 명 이상이니 세상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 그렇다면 정말 기독교는 불의한가?   1. 성격상의 결함 세상 사람들 중에 있는 선하고 친절하고 도덕적인 사람과 믿는 사람들 중에 있는 위선자들이나 불의한 사람과 비교하여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독교는 일반은총을 가르친다.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죄로 물들었다할지라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율법이 없어도 본성상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고 양심이 스스로에게 증거가 되게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 또한 야고보서 1:17을 보면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하고 있다. 선인이나 악인에게 동일하게 해와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께서 선하고 지혜롭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내려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에는 참으로 선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다음으로 교회 내에 심각한 성격상의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교회는 자신의 도덕적 노력을 통해 높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도덕적 노력이나 도덕적 수준으로 보아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나 형편없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니 미성숙한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채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성인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근원적인 변화가 내면에 일어났다 해도 인격의 성장은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인격적 변화 없이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며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문제지 교회 내에 영적 어린아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병원의 역할도 한다.   2. 종교와 폭력 두 번째는 종교가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에 대한 문제제기인데, 그것은 첫날 조금 말씀드렸다. 종교가 문제여서 종교를 없앤 사회가 가장 폭력적이고 불관용의 사회였기에 폭력의 문제는 종교적이냐 비종교적이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개인주의 사회냐 집단주의 사회냐와 상관 없이 발생하는 문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죄의 문제요, 정사와 권세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차후에 다룰 것이다.   3. 광적인 신앙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개인들의 성격적 결함이나 종교의 폭력보다 더 큰 문제는 아마도 광신적인 신자들에 대한 것일 것이다. 특정한 문화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타종교인을 미워하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진화론자들을 악마화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정죄하고, 종교적인 규율을 철저히 지키고, 정경을 문자 그대로 엄수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종교에 거부감을 갖는다. 지극히 도덕적이고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을 일컬어 광신자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성경에서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철저히 자기 의에 빠져서 율법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들을 정죄하는 무리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 사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를 지나치게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광신자들은 지나치게 복음에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할 뿐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 의를 이루었다고 착각할 뿐 기독교의 복음이 철저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진리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한 자라고 착각할 뿐 가장 어리석고 가장 연약한 십자가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이지 복음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종교와 복음은 다르다. 종교는 우리가 자신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노력으로 자기 의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고 복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신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고 말한다. 종교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노력하고 행했다고 말하고 복음은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희생하셨다고 말한다. 종교는 내가 노력했고 복종했기 때문에 신이 나를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복음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로 인해 내가 신에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사람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정죄와 타인의 정죄에 빠진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도덕적인 노력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자기 의에 이르려는 사람들이다. 충분히 노력했고 충분히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의에 빠진다. 하지만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기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죄에 빠진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깊은 좌절을 맛보고 자기 정죄에 빠져든다. 이때가 진정으로 은혜가 필요한 때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완전히 굴복해야 할 때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애초부터 그들은 진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단지 거래 대상자였다. 자기 의를 증명해주고 자기 노고에 대해 보상해주는 거래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 원망은 해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려는 것은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준수한 것이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한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보상을 해줘야 한다. 즉 내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율법에 복종하는 한 하나님은 나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는 채무자가 된다.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은 자신은 채권자이고 하나님은 채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노력하는 한 하나님은 자신을 벌할 수 없고 자신을 공격할 수 없고 자신에게 축복을 주어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을 부정할 필요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필요도, 자신을 넘어설 필요도 없이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가 필요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복해야 할 때에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더 많은 선행을 하고 더 많이 율법에 복종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외식을 할 수밖에 없고 위선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악하고 세속적인 것을 통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을 통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 정죄에 빠지거나 더욱 위선적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고 타인을 공격한다. 타인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것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자기 정죄와 위선의 찔림을 숨기려고 한다. 타자를 악마화하고 타인을 죄인화할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 선해지고 의로워지기 때문이다. 자신은 뼈를 깎는 고생을 하며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자신이 이룬 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심리와 보복심리가 작동한 것이기도 하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현대의 바리새인들인 근본주의자들과 광신자들이 공격적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복음적인 사람 반면 복음적인 사람은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고 견고한 자아존중감 속에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이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자격이 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 구원이 주어졌기에 교만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야했다면 종교적인 사람처럼 자기정죄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확인이나 자기 증명에 에너지를 쓰지 않고, 자기를 방어하거나 주눅 들지도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타인에 대한 정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위선을 부리지도 타인에게 공격적이지도 않은 사람이 바로 복음적인 사람이다.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위선적이며 광신적인 모습은 복음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비판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언서를 읽어보라.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위선적이며 광신적인, 무엇보다도 우상숭배적인 종교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 성경에 담겨있다. 예수님 또한 이런 종교를 가차 없이 비판하셨고, 바로 그 종교에 의해 못 박히셨다.   진정한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 진정으로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위선과 폭력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한다. 영국에서 노예해방 운동을 한 사람들도 복음주의자들이었고, 20세기 중반 미국의 민권운동을 주도한 세력들도 복음주의자들이었고,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를 통해 평화의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었고, 남미의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떨쳐 일어난 사람들도 오스카 로메로 같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렇게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마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Fri, 26 Feb 2016 14:17:47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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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기독교는 율법적인가? 순전한 기독교 2]]> 율법적인가?   고전 9:19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는 너무 가혹한 속박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미명하에 무조건 믿으라고 강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스스로 생각할 자유를 빼앗으며, 그 구성원을 노예로 만들고 최소한 어린아이 취급하며, 그것을 믿지 않을 경우 큰일이 날 것이라고 위협한다고 말한다.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사회운동가인 에마 골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인류를 획일화하고, 모험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의지를 꺾는 쇠로 만든 그물이며, 인간이 활개치고 성장하는 걸 못하게 만드는 속박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종교가 이런 율법적인 면이 없지 않다. 율법은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어떤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옥죄는 차꼬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기독교는 획일적일까? 가장 쉬운 것에 대해 먼저 반론을 해보자.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인간을 옥죄는 구속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문화로부터 온 사람들을 단 하나의 틀에다 억지로 끼워 넣는다고 말한다. 물론 비판받아 마땅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있다. 특히 제국주의적인 선교의 모습을 띈 적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본래적인 선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모습이라기보다 제국주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흐름은 전혀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가 특정 지역 중심에 형성되어 있지만 기독교는 전 세계에 퍼져있다. 유대땅, 지중해 지역,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할 것 없이 기독교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그 확장과 부흥의 원동력은 그 시대 그 지역의 문화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학자인 라민 사네는 기독교가 아니라 개인주의적인 세속주의가 더욱 심하게 아프리카 현지의 문화와 아프리카적인 것을 파괴했다고 말한다. 도리어 기독교는 아프리카적인 영성을 예수 안에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부흥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아프리카인들이 개조된 유럽인으로 태어나게 도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프리카인으로 새로이 태어나도록 도왔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라. 어떻게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급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을까?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예루살렘 공회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문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직 복음만을 전한다. 기독교는 율법을 폐지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 문화라는 것이 따로 없다. 모든 문화가 기독교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본래의 기독교적인 모습이다.   기독교 최고의 사도인 바울은 어떠한가? 고전 9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얼마나 멋진 표현이며 다문화적인 정신인가? 기독교는 결코 획일적이지 않다.   자유란 무엇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문제제기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자. 기독교가 자유를 속박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밖에서 주어지는 의무나 특정한 목적 혹은 불변의 진리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다. 우리 자신의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만들고, 객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낼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유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먼저 어떤 구속이나 제약이 없어야 자유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물이라는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가? 물고기는 물이라는 제약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 아닌가? 기차가 레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 탈선이라고 말할 뿐이다.   제약은 반드시 필요하다. 스포츠 경기는 하나같이 경계선이 있다. 그것을 벗어나면 아웃이 된다. 아웃이 되는 것이 싫다고 해서 경계선을 없애버려야 하는가? 그 경계선의 구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경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진정한 자유는 경계선을 없애는 자유가 아니라 그 경계선을 이용할 줄 아는 자유이다. 악기를 자유롭게 연주한다는 것이 악기의 특성이나 음의 제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할 줄 알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실력을 키우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현실적인 제약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축구장만한 운동장에서 족구를 해야 한다면 그런 조건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경기장의 크기를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경계선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시차를 하나의 시점으로 모아서 그림을 그린다. 기존 그림의 문법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 문법 자체의 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너부러져있는 파편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림 문법의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 문법의 창조인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제약이 필요 없는 상태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제약 안에서 제약을 이용할 줄 아는 자유를 말하며, 올바른 제약 즉,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제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가 어떤 구속과 제약을 제안했을 때는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어떤 구속과 제약을 제안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기독교는 기존의 어떤 구속과 제약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갱신하는 능력의 종교다. 유대인이 절대시하는 모세의 율법을 전면적으로 파기하지 않았는가? 헌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는 새포도주의 능력을 가진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사람을 억압하는 안식일마저 거부해버리는 변혁적인 능력이 있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거나 속박하거나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렇게 만드는 율법을 폐하는 종교다.   사랑의 구속이 진정한 자유 그렇다면 그런 능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랑만이 진정한 자유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랑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진정한 자유의 능력이지만 사랑이 주로 하는 일은 속박과 제약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하기 전에는 나는 모든 여인에게 자유로웠다. 모든 여인에게 자유로운 것이 진짜 자유일까? 모든 여인에게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여인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될까봐 두렵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모든 여인에게 자유로운 관계는 사실 두려움의 관계이다. 이런 관계가 진정한 자유일 수 없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사실 어떤 구속이나 제약이 필요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만의 감옥 안에 갇혀 사는 것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감옥에 사는 것이다. 감옥에 살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자유를 맛보지 못한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속박과 제약이 생기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바로 그 속박과 제약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그 사랑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는 감옥의 문이 산산조각난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라.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이시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신이시지만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자신에게 속박과 제약을 가하신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 신이 인간이 갖는 모든 속박과 제약을 스스로에게 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 물리칠 권세와 능력이 있으셨고 그것을 사용할 자유를 가지셨지만 스스로에게 속박과 제약을 가하셔서 그 자유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에 십자가라는 속박과 제약을 자신에게 가하신 것이다. 사람을 용서하고 사람을 자유케 하고 사람을 해방케 하는 속박과 제약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다.   이런 사랑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사랑의 구속을 통해 오는 것임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속하노라.”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삶을 살아간다. 온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살기 바란다. 어떻게 바울처럼 살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살고 싶지는 않은데,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모순이다. 그럴 수 없다.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이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말하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위험한 종교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내어주신 이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부르신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삶이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C. S. 루이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인가요?”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쉽습니다.”  ]]> Fri, 26 Feb 2016 14:09:17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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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기독교는 배타적인가? 순전한 기독교 1]]> 배타적인가?   4:12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기독교가 너무나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주장처럼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거나 혹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너무나 배타적으로 들린다고 한다. 또한 배타적인 것은 편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이런 배타성이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런 배타성이 종교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근대 세계의 출발에는 이런 종교전쟁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기도 있다.) 그들은 기독교가 진정 사랑의 종교라면 이런 배타성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이런 문제제기를 세부적으로 살펴보고, 역으로 그것을 반박함으로써 그러한 문제제기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1. 종교를 불법화하라. 종교가 배타적이라는 문제의식에 대한 해법은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종교를 금지시키는 것이다. 나치 독일 등은 국가가 종교를 잠식하거나 통제하려 했고, 구소련이나 동구, 공산 치하의 중국 등은 아예 종교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종교가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에 종교를 금지시키기로 결정한 사회의 역설은 종교를 금지시킨 결과 더 많은 평화와 안정을 이룬 것이 아니라 더 큰 억압과 폭력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가장 괴로운 역설은 불관용과 폭력의 원인이 종교라고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가장 극악무도한 불관용과 폭력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폭력과 불관용은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든 부정하려는 사람들이든 어떤 다른 이유에 의해 불관용과 폭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가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주장은 사회가 발전하면 종교는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소위 세속화 이론이라는 것인데, 종교를 계몽되지 않은 전근대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뿐인 일시적인 현상으로 본다. 사회가 세속화되고 문명이 더 진보하면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 자체는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즉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주장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지만 여전히 종교는 세상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선진국에서조차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종교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의 주장은 우리를 진화의 일부로만 보기 때문에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검증되지 않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하다.   2. 종교를 탓하고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설득하라. 종교의 배타성에 대한 두 번째 해법은 어차피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 축소시키고 힘을 잃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논쟁 등을 통해 건강한 상식을 심어주어서,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멈추게 하고, 각자의 종교가 모두 진리나 구원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라고 여기게 만들자고 한다. 이들의 주장들을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것들이 있다.   첫째, 모든 종교는 결국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의 교리적인 차이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고 핵심적인 것은 결국 동일하며 모두 동일한 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매우 배타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신관과 구원관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틱 냐한 스님, 프랑스 플럼빌리지 정문에는 예수상과 붓다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쓰기도 했다. 모든 종교는 똑같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가 기독교의 진리도 아니다. 불교식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이며, 불교의 교리로 해석한 진리일 뿐이다. 불교가 예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으로 인정하는가?   종교의 핵심적인 교리 간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있는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것을 너무 쉽게 건너뛴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매도한다. 이것이야말로 비상식적이며 배타적인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관용을 앞세운 독단이 거기에 숨어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비판하는 종교와 다른 방식으로 배타적일 뿐이다.   둘째, 종교 자체는 각각 영적 진리의 일부만 보는 것일 뿐 어떤 종교도 진리 전체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맹인과 코끼리의 비유를 많이 든다. 코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가 뱀과 같다고 말하고,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가 나무기둥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인데 자기가 본 것을 전체로 여기고 다른 주장들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바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모든 진리는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도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은 정도밖에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맹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뜬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은 맹인과 다르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독선이며 교만 아닌가?   셋째, 종교적 진리도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영향을 받은 상대적인 지식이므로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예전에는 모든 종교는 똑같이 진리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노골적으로 모든 종교는 똑같이 거짓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소위말해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깊이 논할 필요도 없다. 이미 철학적으로 모순적인 주장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상대주의는 오직 절대주의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주장이고, 회의론도 마찬가지다. 상대주의나 회의론이 참이려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어떤 주장도 참일 수 없다는 주장 자체는 절대적인 진리여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모든 것이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라면 상대주의도 참이 아닌 것이다.   3. 종교를 완전히 사적인 일로 묶어두라. 종교의 배타성에 대한 세 번째 해법은 어떻게도 종교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은 하되 철저히 사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방법이다. 어떻게든 종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그들은 종교를 오직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놓고, 종교는 단지 사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일 뿐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공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결코 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첫째는 공적인 이슈에 대한 세속적인 주장들도 그것이 도덕적인 주장인 한 궁극적인 가치 즉, 매우 종교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권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자.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진리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적인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적자생존 해야 하며 열등한 존재는 우등한 존재와 똑같은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결국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공적인 도덕은 상식처럼 쓰이지만 모두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종교적 신념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문제는 종교라는 것이 사실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거나 사적인 영역에 대한 해답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종교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삶과 세상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 체계다. 한마디로 그 안에 인생관과 세계관 혹은 서사적 정체성이 담겨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사적인 영역에서는 종교적이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세속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내 자아의 일부를 떼어놓고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폭력적이고 독선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주장은 매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문제제기 하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 그들이 주장하는 부정적인 종교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제기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되 우리만의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편으로 어떤 주장도 배타적인 성격이 없지 않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주장도 배타적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모든 주장이 배타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배타적인 면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모든 주장이 배타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배타적인 면을 가진 주장들 중 어떤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고 서로 이해하게 하며 대립을 넘어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가 권력의 종교, 기득권의 종교, 부자들의 종교, 탐욕의 종교, 전쟁의 종교로 타락하기 전,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이 나타났던 성경시대의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배타적인 종교만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대속물로 죽을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에 그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서 모든 막힌 담을 허셨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철학과 최고의 문명도 할 수 없었던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의 막힌 담을 헐고 진정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것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고백하는 배타적인 주장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능하게 하는 교리이며, 삼위일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사귐과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임을 보여주어야 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페리코레시스이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하나님께서 상호침투하고 상호내주하는 관계, 즉 서로를 초대하고 거처를 제공하며 자신을 나누는 공동체적 관계이며, 무아적인 사랑의 힘으로 서로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게 되는 사귐의 관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완전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자신을 내어주신다. 거기에는 배타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페리코레시스의 원뜻은 원무이다. 둥글게 돌아가면서 추는 춤을 말한다. 따라서 위일체는 하나의 춤이다. 춤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춘다. 원수하고 춤을 추지는 않는다. 원수하고는 싸울 뿐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에 오직 춤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춤을 추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기독교는 춤의 종교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처럼 춤을 출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과 다툼을 멈추고 모두가 함께 춤을 출 수 있도록 만드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배타적인 주장이야말로 삼위일체를 가능하게 하고 삼위일체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는 춤의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함께 춤추시지 않겠습니까? Shall we dance?”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전도이다.]]> Fri, 26 Feb 2016 13:05:51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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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더불어숲동산교회 정관 개정안]]]> Mon, 14 Dec 2015 15:14:57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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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더불어숲동산교회 정관 개정안]]]> Mon, 14 Dec 2015 15:13:33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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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김종우 형제(김순영 성도 남편)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Thu, 26 Nov 2015 17:57:39 +0000 기도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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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의자리폼]]> 더불어숲 동산교회가 봉담에 함께한 시간이 6년이 되어갑니다.

더숲교회 공간을 만들면서 중고로 구입했던 12개의 이 의자들...

..

첨엔 '디자인이 좀 올드하지 않나..?' 하며

그저 그랬던 이 의자들이..

많은 시간과 일들을 함께하며,

더 낡고, 방석 원단들은 꼬질꼬질 해졌지만

정이 담쁙 들었네요...

게다가 앉으면 엄~청^^ 편하고 가볍고..

돈주고 못사지 않을런지?..

..

한현숙 카페 팀장님의 리폼요청과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센스있고 야무지게

도와주신 황미숙 짐사님..

따뜻한 마음으로 달려와주신 든든한 허선미집사님..

유비 돌봐주시느라 몸살 나신 정선희권사님

감사합니당^^~복 많이 받으세요..

리폼 before입니다.

다른 의자와 달리 의자 본체와 방석이 피스로 연결된게 아니고 타카핀이 밖혀있어서

당황하고 있는데,, 김기호 집사님 보시더니 발로 뻥~

큰일을 해결해 주시고,,핀정리 해주셨구요..

분리된 방석들을 여러가지 원단들로 감싸서 손타카로 고정했습니다..

요 과정이 이날 제가 핸드폰도 안가져가고,,

유비안고 빌려서사진찍고 해서 그런지..흔들리고 남은 사진이 없네요..

의자 나무 본연의 자연스럽게 낡음이 좋아서 2개만 칠하기로 했는데요..

페인트 칠하기전 젯소 바르기는 시원이가 도와주었답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의자1번 ㅋ

계획은 따뜻한 warm grey 와 뭔가 찐한 예쁜컬러를 칠하려 했으나..

조금 '애매한 그레이'칼라 2개 칠하고,,마무리가 되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 6년후쯤 다시 리폼해 줄께...예쁘게'

컬러 안칠한 의자가 본래 느낌이 있어서 더 좋은것 같기도 하구요..

리폼 완성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공간과 물건들이 그저 낡아지는고 버려지는 것보다

 수리해주고 보살펴지는 더불어숲 동산교회 모습이 참 좋으네요..

그 안의 우리들도,,,서로 보살피며 보듬으며 살아야겠지요...

부족한 제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저도 리폼 해주세요..ㅋㅋ

]]>
Mon, 09 Nov 2015 17:00:27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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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기도요청 페이지 이용안내입니다.]]> Thu, 29 Oct 2015 16:04:15 +0000 기도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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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자유게시판 이용안내]]> Thu, 29 Oct 2015 16:03:26 +0000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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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10월 26일 _ 분상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합니다 .]]> Thu, 29 Oct 2015 15:30:13 +0000 기도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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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더숲, 홈페이지가 새로운 공간을 열어갑니다.]]> Thu, 29 Oct 2015 15:18:40 +0000 자유게시판